육룡이 나르샤,두문동 참극 '두문불출 유래'
'육룡이 나르샤'는 정몽주를 암살한 후 조선 건국의 시기를 빠르게 그려나가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 정창군 왕요로부터 정몽주를 효수하겠다는 교지를 받아내었다.
정도전은 정몽주의 죽음이 모두 이방원의 독단적 결정이며 이 일이 이성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소문을 내게 하여 조선 건국의 명분을 만들고자 하였다.
권력을 가진 이방원에게 패도라는 것이 처음이 어렵지 그 후로는 쉬운 일이고 적성에도 잘맞는 일인가 보다.
조선이 건국되고 인재등용을 위해 과거시험이 열렸다.
그러나 피로 시작된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거부하는 유생들이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태종(이방원)
이방원(유아인)은 두문동에 숨어든 유생들을 설득하겠다고 나섰고 하륜(조희봉)과 무휼(윤균상),조영규(민성욱)을 데리고 두문동으로 향했다.
정몽주 영정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있는데,이방원의 마음 속에는 목적달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고 행할 수 있는 패도의 본성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태종 이방원의 인생은 숙청의 인생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를 억누르기 위해서 마음 속 롤모델로 둔 정도전을 따르는 척 했으나 피의 선죽교 사건으로 그 본성이 각인된 듯 하다.
이방원은 설득이 되지 않는 유생들이 있는 곳에 불을 지르라 말하고 힘에 굴복하는 이들만을 설득시키기로 하였다.
정도전
이 두문동 참사는 실제 있었던 일로 조선시대 성거산 서쪽에 고려가 멸망하자 고려의 신하 72명이 살던 곳이다.
두문불출이라는 말에서 두문동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시작이 되었다.(두문불출은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정조 때 이자리에 표절사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두문동 72현 중희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이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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