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보여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팅커스>는 죽음을 여드레 앞둔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땜장이이자 만물상, 수선공인 아버지 하워드, 시계 수리공인 조지, 그리고 그의 가족들의 3대를 관통하는 가족사, <팅커스>는 미국 초창기의 궁핍한 생활의 면면을 하딩의 만연체와 사물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로 인해서 문학적으로 승화된 듯 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잡다한 소리와 일 초, 일 초 흘러가는 무의식적인 시간이 마치 인생의 한 단면을 이루는 섬세한 운율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쓴 폴 하딩은 생애 첫 작품인 처녀작 <팅커스>로 2010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가히, 문학계의 신데렐라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제 손에 들어오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면 이 작품을 쓴 작가 하딩의 노고와 사물에 대한 관찰과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들에 대해서 퓰리처상이 결코 과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중에서 LA 타임스의 한 구절이 제가 느낀 감정을 잘 표현한 듯 하여 일부를 옮겨봅니다.
........ 눈과 오렌지, 먼지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진짜 냄새를 맡고 감각하고 방 안에 있는 듯한 실감을 얻는다. 다른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글의 힘도 그렇게 사물의 정수를 불러내는 데 달려 있다.
책의 겉표지에는 이 책의 첫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는 죽기 여드레 전부터 환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빌려온 병원 침대에 누워 천장 회반죽에 생긴 상상의 균열로 벌레들이 빠르게 들락거리는 것을 보았다.'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는 죽기 여드레 전부터 이 상상의 균열을 통해 자신의 성장기 속으로 되돌아가 아버지 하워드와의 기억을 섬세하게 되짚는 일종의 시간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의 아버지인 하워드와 재회하면서 생을 마감하게 되지요.
이 과정 속에서 조지는 자신의 인생을 녹음 테이프에 기록하려고도 애써 보지만 자신의 인생을 반추시켜 볼 때 기록할 만한 장면이 없음에 녹음 테이프를 화로 속에 집어 던지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읽으면서 너무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필자가 조지처럼 생을 마감하게 될 때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려 하는데 기록에 남길 만한 아무런 역사적 사건이 없다면 삶이 너무나 허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어서 이런 포스팅 하나하나가 제 가치관과 관심사를 담고 있어서 그러한 개인의 역사가 담겨져 가고 있다고도 생각해 봅니다만, 생을 마감하게 될 때 좀 더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이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위해선 좀 더 열심히 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딩의 문체를 닮은 시선으로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사물과 자연과 사람들에게 좀 더 애정어린 시선으로 뇌리 속에 깊숙히 간직하도록 노력하면서 자신의 삶이 빛나도록 살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New old skeleton watchworks, seen through its crystal back by readerwalker
삶이라는 무질서한 혼란
하딩은 조지와 하워드의 삶을 번갈아가면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 페이지는조지의 삶, 한 페이지는 조지가 환각 속에서 만나는 하워드의 삶이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고 있지요. 그리고, 만연체의 숨가쁜 문체로 독자로 하여금 되도록 숨가쁘게 읽어나가도록 의도한 듯 합니다. 그 만연체 속 문장 속의 조지와 하워드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묘사는 때로는 시계의 복잡·정밀한 부속품들처럼 섬세하고, 때로는 하워드의 간질병처럼 별안간 급살맞은 잉어처럼 정신 없는 혼돈의 세계를 펼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혼란스러움과 무질서함은 우리네의 '삶'의 이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삶이라는 무질한 혼란은 조지와 하워드가 만난 짧은 순간 속에서는 평온함과 안식을 되찾습니다. 바로 '죽음'이라는 평온과 안식이지요. 조지의 죽음이라는 평온함과 안식 속에서 하워드는 조지에게 가족들의 안부를 묻습니다. 마치, 일상 생활 속에서 안부를 묻듯이 말이죠.
이 장면에서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누구나 맞이하게 될 죽음의 모습이 두렵고, 공포스런 모습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어쩌면 하워드와 조지는 작가 하딩의 가족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느끼고 있는데요.
이 작품 속에서 땜장이는 하워드 한 명 뿐임에도 불구하고 '땜장이들'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즉, 삶과 죽음으로 귀결되는 인생의 귀결을 우리는 가족들에게 되물려주는 '땜장이들'인 셈이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식은 다시 그 자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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