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하시마섬 역사 지우기,하하 다카시마 공양탑 울분와 비통의 묵념
우토로 마을에 이어 하하의 배달의 무도는 지옥의 섬인 하시마섬으로 이어졌다.
하시마섬은 군함 모양을 닮아 군함도(군칸지마)로도 불리는 곳이다.
우리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 하시마섬을 유네스코에 등재시켰다.
화려한 생활의 호화로운 아파트 고층에는 일본인들이 살았고, 그 아래 지하에는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강제노역장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지하 1000m 탄광 속에서 최고 섭씨 45도의 지열과 싸우면서 배고픔 속에서 육체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일본은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서 꼼수를 쓰면서 강제 징용 시기를 제외하고 등재 신청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강제 징용 시키는 1916년 이후인데 일본이 등재 신청서에 기재한 시기는 1850년~1910년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강제 징용 사실을 명시하도록 요구했고 일본 역시 강제 징용을 인정하기로 합의했으나 세계문화유산이 등재되자 '포스드 투 워크(forced to work)'라는 표현은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며 말을 바꿨다.
하하는 서경덕 교수와 함께 첫째날 하시마 섬을 찾았으나 파도가 높아 들어가지 못했고, 다음날은 하시마 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강제징용에 대한 것은 지운 채 관광코스로 일부만을 공개하고 있었다.
하하는 그곳에 있기가 힘들다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더욱 충격적인 내용은 강제징용을 하다 희생당한 한국인 유골 100여구가 이곳에서 떨어진 다카시마 섬에 묻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길을 알지 못하면 절대 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깊숙한 곳에 한 일본기업이 세웠다는 공양탑을 찾은 하하는 여기를 어떻게 찾아오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서경덕 교수는 "하시마 탄광에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서 위패를 적어놓은 것을 이쪽으로 옮기기 전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분인지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가 없다"라며 설명을 하였다.
하하는 다음날 하시마섬의 생존자이신 두분의 편지를 받아서 다시 다카시마 공양탑을 찾았다.
그곳에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따뜻한 밥과 국을 올리고,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일평생 강제징용을 당하며 비통한 죽음을 당하신 분들께 묵념을 올렸다.
일본은 하시마섬의 강제징용의 역사를 왜곡을 넘어 역사지우기에 돌입하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무한도전'의 이번 기록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보여진다.
좀더 디테일하게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p.s. 일본은 강자에 허리를 굽히고, 약자에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이 허리를 숙이도록 우리나라가 국력을 키우는 길만이 이같은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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