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123번째 이야기> 2011년 설날 특선영화 원제: Poetry (2010)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39분 감독: 이창동 출연: 윤정희, 김자영, 이다윗, 김희라, 안내상 영화 평점: 영화 몰입도: ※ 영화 평점 및 기타 그 외의 평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을 양해 바랍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리뷰를 쓰기 전 이 영화 <시>에 나오는 시 한 편을 먼저 소개해 드려야겠습니다. 시를 쓰기가 어려워 평생 시 한 편 쓰는 것이 소원이었던 주인공 미자(윤정희 분)의 시입니다.
아네스의 노래(이창동)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녘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아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이 <아네스의 노래>는 영화 OST로 박기영의 노래로도 불리워졌습니다. 미자의 처녀작이자 유작이면서, 아네스를 위한 진혼곡이기도 한 셈이죠.
영화를 보게 되면 <아네스의 노래>을 읊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심상이 <시>의 영상과 많은 교감을 이루는 것을 느끼실 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시가 주는 전율을 영상으로 잘 표현해 낸 작품이 <시>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영화는 많은 문학적 시녀들을 거느리고 다닙니다. 책, 뮤지컬, 연극, 다큐멘터리 등...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말 속에는 이러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광의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부문에 '시'라는 장르까지 아우르게 되어 이렇게 영상미학과 함께 감동을 준다는 것은 영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작품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목숨빚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미자의 손자는 친구 6명과 함께 16세 소녀를 집단 폭행하여 그녀를 자살에 이르게 합니다. 하지만 당사자의 부모나 학교 관계자들은 이들의 죗값을 치르게 하기는커녕 그 사건을 조용히 덮으려고 합니다. 단지 소녀의 부모에게 보상금으로 두당 500만원씩 총 3천만원의 합의금을 주려고만 하지요.
미자에게 500만원은 적은 돈이 아닙니다. 기초생활지원금을 받을 정도로 생활이 궁핍한 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위해 호스피스를 하면서 연명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미자는 도통 500만원의 위자료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듯도 보입니다. 오직 시만 생각하며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되고, 사람들과 시에 대해서 논하기만 좋아하며, 마음은 순진한 16살 소녀 같은...자신이 처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모습입니다. 심지어 나머지 아이들의 부모는 불철주야 사건무마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미자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며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꽃다운 노년을 보내는 사람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병원에서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미자를 보기에 관객들은 치매가 걸려서 저러나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16세 소녀 아네스의 죽음을 애통해 하던 미자는 그녀에게 진 마음 빚과 목숨 빚을 갚으려고 했다는 것을 <아네스의 노래>가 낭송되는 동안 발견할 수 있습니다. 500만원을 구하기 위해 미자는 자신의 몸을 자신이 간병하던 노인네에게 바칩니다. 그녀가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돈 500만원을 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아네스가 6명의 아이들에게 당한 고통을 갚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으로 끝인가요? 다 된건가요?"
500만원을 들고 찾아가 자신의 몫을 내놓으며 던지는 미자의 질문에 "네. 이제 다 해결됐습니다. 아무런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듣지만 미자 대사 뉘앙스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미자
"잠깐 나와봐~짐승도 자기 흔적은 남기지 않는다. 이거 봐라. 니가 먹은 과자 껍데기...양말도..."
미자는 손자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도,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주고 발톱까지 깎아줄 만큼 애정이 각별합니다. 그리고, 시가 완성된 날 미자는 아마도 중대한 결심을 한 듯 합니다. 손자가 죗값을 치르도록 할 것인게지요. 사건이 마무리되고 500만원의 위자료가 건내져도 그것은 미자와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이미 마음을 굳혔을테니까요. 미자의 시가 낭송이 되면서 미자가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를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아네스에 대한 손자의 목숨빚을 손자 대신 갚은 것입니다.
<아네스의 노래> 후렴구에도 이 의미가 되새겨져 있습니다.
영화 <시>는 아름다운 싯구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은 영화입니다.
<아네스의 노래>와 함께 올라가는 영상들을 보며 아름답게 느껴질수도 있고, 슬프도록 처연하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3천만원의 위자료로 충분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는 증거이겠지요.
하지만, 영화 <시>가 제 마음을 아름답게 아로새기는 것은 '미자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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