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블로그 편집장입니다.
오늘은 재밌게 시청중인
'고려 거란 전쟁'에 대한
정보 포스팅입니다.
'고려 거란 전쟁'
장르: 대하사극, 전쟁, 드라마, 액션, 정치
총 32부작
원작 <고려거란전쟁:고려의 영웅들>
출연: 김동준, 최수종, 지승현
제작비: 270억원
시대적 배경: 제2차 여요전쟁, 제3차 여요전쟁
1009년(고려 목종12 / 현종 원년)~1019년(고려 현종 10)
918년~1392년(474년)
-시대구분-
건국 초기(후삼국시대)
문벌귀족기
무신정권기
원 갑섭기(권문세족기)
말기(반원개혁기)
고려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약 474년 동안 한반도에 위치한
전제군주정 불교 국가였습니다.
918년에 왕건은 태봉 국왕 궁예를
역성혁명으로 몰아내고
태봉을 멸망시키며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고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시대는
936년에 왕건이 통일하여 종식되었고,
이후 약 456년 동안
34명의 군주가 계승하였습니다.
다만, 918년부터 936년까지의 18년은
엄밀히 말해 고려시대가 아닌 후삼국시대입니다.
따라서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부터
고려가 멸망한 1392년까지의 역사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약 456년에 해당합니다.
1392년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
고려는 함경북도의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하였습니다.
태조 왕건-혜종-정종-광종-경종-
성종-목종-현종-덕종-정종-문종-
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
의종-명종-신종-희종-강종-고종-원종-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
현종(김동준)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사생아로 태어나
왕이 된 인물.
현종은 태어나자마자 전란의 시대를 맞이하였고,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존했고,
강조의 정변으로 이어진
혼란 속에서 목종의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의 왕위 즉위 이후,
그는 요나라의
두 번의 대규모 침공에 맞서야 했습니다.
이는 고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였지만,
현종은 이를 극복하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전쟁에서의 승리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제도를 확립하며,
고려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고려는
제8대 현종부터 제17대 인종까지
130년 이상 황금기를 누리며
동아시아 3국(고려 - 거란 - 송) 간의
균형있는 국제관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혈통은
고려 왕조의 중흥을 이끌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고려 왕조의 중흥지주로 기억되었습니다.
강감찬(최수종)
고려 시대의 문관이자 장군인
강감찬 장군은 현종을 보좌하며,
제3차 여요전쟁에서는
도통사로서 고려군을 지휘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습니다.
귀주대첩의 엄청난 승리와 여요전쟁이
고려와 동아시아 전역에 미친 영향을 고려할 때,
한국사 전체에서 을지문덕,
이순신과 같이 명장으로 인정받기도 합니다.
강감찬은 또한 <고려사>에서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 중 하나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에서 태어난 관련으로,
이 인물은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양규(지승현)
제2차 여요전쟁이 벌어진
고려시대 초엽에 양규 장군은
문관이자 무장으로 맹활약했습니다.
거란과 요나라의 역사에서
최고의 정복군주이자 명군이었던
성종이 친정에 있을 때,
소수의 정예 고려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며,
포로로 잡히던 여러 백성을 구출한 영웅으로서
<고려사>에서 유금필, 척준경, 김경손과 함께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큰 전적을 올린
고려의 용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제1차 여요전쟁에서는
군사 서희가 거란의 공세를 물리쳐 기틀을 마련했고,
제3차 여요전쟁에서는
고려 군주 현종과 상원수 강감찬이
금교역 전투와 귀주대첩으로
장대한 대거란 전쟁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던
제2차 여요전쟁의 주인공으로서
도순검사 양규는 고려의 멸망을
극적으로 막아낸 구국의 명장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흥화진 전투-
고려군과 거란군은
강동 6주의 하나이자
요충지인 흥화진(興化鎭)의 지배권을 놓고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는 여요전쟁 시기 중
제2차 여요전쟁 때 일어났습니다.
흥화진 성은 현재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에
위치한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삼수채로 둘러싸여 있어
작지만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009년에 발생한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의 제6대 성종이 직접 4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 침공은 겨울에 일어났기 때문에
압록강이 얼어서 거란군의 기병들이
빙판 위를 지나가며
고려의 최전방 요새인
흥화진의 고려군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원정황후(이시아)
현종은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군을 피해 몽진하면서
원화왕후와 함께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임신 중이었던
원화왕후가 유산을 했거나
아이를 낳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몽진 중에 원화왕후가 유산을 했거나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영아사망률이 높았지만,
무엇보다 현종은 거란군을 피해 피난을 갔을 때
지방 호족들의 경멸,모욕,간섭,암살 시도 등
위험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원화왕후가 겪은 어려움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후 1018년 4월 제3차 여요전쟁이 치열한 시기에
원화왕후는 현덕궁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원화왕후의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남편인 현종의 나이는 26세였으며,
당시의 결혼 연령을 고려하면 원화왕후의 나이는
20대에서 30대 초반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그 후에는 현화사에 그림이 걸려
큰 예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복누이인 원화왕후도
왕자인 왕수를 낳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종실 열전>에서 누락되어 있어
원화왕후의 자녀에 대한 정보도 불분명합니다.
정상적으로 출생했다면
왕수는 1011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종 21년인 1030년 2월에 사망한
적경궁주(積慶宮主)인 효혜라는 인물이 있는데,
다른 왕녀들과 같은 '효'자를 가진 시호를 받았으므로,
원화왕후의 기록되지 않은 자녀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고려사》의 중복과 오류를 고려하면,
1030년 7월에 사망한 원화왕후 소생의
적경공주(積慶公主)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원화황후(윤채경)
고려 제6대 성종과
연창궁부인 최씨의 딸이었습니다.
원화왕후는 이복자매인
원정왕후처럼 어머니의 본관을 따랐습니다.
효정공주(孝靜公主/孝靖公主),
천수전주(天壽殿主)라는 두 딸을 낳았습니다.
고려사의 <세가>에 따르면
제9대 덕종보다 1개월 늦게 태어난
왕수(王秀)라는 아들도 있었지만,
<종실 열전>에는 이 아들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원화왕후는 항춘전(恒春殿)을 분봉받은 왕비였으며,
후에 전각의 명칭을
상춘전(常春殿)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또한, 남편인 현종을 따라
제2차 여요전쟁 중에 남하하였습니다.
원성황후(하승리)
조부는 안산현 개국후인 김긍필이고,
조모는 안산군대부인이었습니다.
외조부는 소성현 개국후인 이허겸이었습니다.
이허겸은 인천 이씨의 시조로,
현종과 결혼한 원성왕후 김씨의 영향으로
인천 이씨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문종 때 이자연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외척으로 성장하였고,
인종 때 이자겸이 등장했습니다.
이자겸은 원성왕후 김씨의 외조부인
이허겸이 받았던
소성(邵城) 지방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안산군 개국후인 김은부이고,
어머니는 안산군대부인 이씨였습니다.
현종의 자매로는 제4비 원혜왕후와
제7비 원평왕후가 있었습니다.
제2차 여요전쟁 때
젊은 왕 현종은 거란의 대군을 피해
충청남도 공주시까지 내려갔습니다.
이때 공주절도사 김은부가
현종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현종은 김은부의 세 딸을
원주로 맞이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인 원성왕후는
현종에게 직접 옷을 지어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조부모와 부모들은
사후에 당시 관습에 따라
안산을 본관지로 하는 작위를 받았습니다.
현종과 원화왕후는
덕종과 정종이라는 두 아들,
그리고 문종의 제1비 인평왕후와
경숙공주라는 두 딸을 가졌습니다.
현종은 19년(1028년) 7월에 사망하였으며,
현종보다 3년 앞서 사망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3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목종(백성현)
고려시대에서 제7대 대왕이자
해동천자라 불렸습니다.
목종은 묘호로는 "穆宗"이라 불리며,
시호는 "선양대왕"이었습니다.
또한, 목종의 능호는 "의릉"이고,
휘는 "송"이었으며,
자는 "효신"이었습니다.
목종은 경종(제5대)과 헌애왕후 황보씨의 아들로,
왕자 시절에는 '개령군'으로 불렸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왕실 내에서
족내혼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져
목종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가
모두 왕과 왕후였습니다.
또한, 증조모들은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 출신이었으며,
부인인 선정왕후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친손자인 홍덕원군이었고,
어머니는 광종(제4대)의 딸인 문덕왕후였습니다.
이로 인해 목종은 가계도가 매우 복잡하고
권력을 갖춘 가문과의 연결이
매우 강력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종은 고려 왕조에서
처음으로 폐위되어 유배되고,
결국 처음으로 시해된 왕이 되었습니다.
이는 목종의 정통성과는
대조적인 역설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천추태후(이민영)
헌애왕후는 고려 왕조의
창업 군주인 태조 왕건의 손녀로,
고려 제5대 국왕인
경종의 제3비이자
제6대 국왕인 성종의 여동생,
그리고 제7대 국왕인 목종의 모후입니다.
또한, 헌애왕후는 고려 제8대 국왕인
현종의 이모이자 사촌누나입니다.
생전에는 아들인 목종으로부터
'응천계성정덕왕태후'라는 공식 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헌애왕후가 거주하던 천추전(千秋殿)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는
'천추태후'라고 비공식적으로 불렸습니다.
사후에는 제8대 국왕 현종이 올린
시호로 '헌애왕태후'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남편인 경종의 시호인 '헌'자를 따서 시호를 받았으며,
이를 줄여 '헌애왕후'라고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강조(이원종)
고려 초기의 문관이자
권신인 강조는
고려 왕실 반정의
시초 격으로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강조는 목종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으나,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습니다.
또한, 거란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는
직접 출정하여 선전하였으나,
통주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요나라 성종의
회유를 받았지만 완강히 거부하고,
전장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강조의 정변-
1009년(고려 목종 12년, 기유년)에는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력을 동원하여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제2차 여요전쟁에서
요나라가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침공 명분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채문(한재영)
고려의 제8대 국왕인 현종 시대에는
봉산 지씨(鳳山 智氏)라는 인물이
무장 및 관료로 활약했으며,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란(요나라)의
제6대 황제 성종이 일으킨
제2차 여요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활약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993년(성종 12년)부터
1019년(현종 10년)까지
약 26년 동안
여러 차례로 진행된
요가 고려를 침략한 전쟁을
여요전쟁(麗遼戰爭) 또는
고려-거란 전쟁(高麗-契丹戰爭, Goryeo-Khitan Wars)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은 고려와 거란(契丹) 사이에서 벌어진 것으로,
세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습니다.
<제1차 여요전쟁>
993년 발발.
서희의 강동6주 외교담판
<제2차 여요전쟁>
1010년 발발.
<제3차 여요전쟁>
1018년 발발.
-귀주대첩-
1019년 2월 1일,
제3차 여요전쟁 중에
상원수인 강감찬 도통사와
원수인 강민첨 대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는 약 25년에 걸친
여요전쟁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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